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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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4월 11일은 101번째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입니다. 지난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은 우리에겐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왜 4월 11일이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로 제정이 되었는지 그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기념일

 

1. 임시정부 수립 배경 및 역사적 의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을 했지만, 1919년 3·1 운동을 시작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민주 독립을 위해 이후 1500 회가 넘는 만세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수만은 국민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했으며, 체포되었지만 3·1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그 정신은 밑거름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으로 이어졌습니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처음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 통과에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1989년 4월 13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로 지정을 했지만 당시 논란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국호와 임시헌장이 발표되고 국무원(1919년 4월 중국의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정부)이 선임된 날이 1919년 4월 11일 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2019년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변경되었습니다.  

 

 

 

3.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최초 임시 정부는 1919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내에 설립되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상하이로 장소를 옮긴 청년단원들과 독립운동가들에 의하여 설립이되었습니다. 9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였고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체제완성되었습니다

 

 

이후 임시 정부청사는 광복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독림운동가들은 중국의 외면을 받았지만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에서 윤봉길 의사의 항거 활동 이후 중국 정부의 비밀스러운 재정 지원을 받게 됩니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공식적으로 돕지는 못했지만, 비공식적으로 큰 도움을 줍니다. 

 

 

4.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계

대한민국 인시정부는 3·1 운동 이후 분화됐던 민족은동의 종합적인 성격을 뗬지만 일치된 힘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민족독립 열망의 총체적인 결과물이지만 국가기구로서 통합체적 역할을 통해 일치된 힘을 보여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국가기로 통치권을 행사를 해야 하는데 행사할 대상인 국민과 연계가 되지 못했고, 임시정부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만주 등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통괄 지휘를 했으며,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해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 한 연통제(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 조직) 활동 및 국내 지방을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습니다. 국제회의에 참가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려는 등 외교 활동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5.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마지막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으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신과 인간이 일치함으로 서울과 지방에서 호응하여 서울에서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린 지 30여 일에 평화적 독립을 300여 고을에서 되찾고 국민의 신임을 바탕으로 새롭게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적이고 완전한 자주독립을 우리 자손 만민에게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 하노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맞이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맛서 싸운 그 시절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의 숭고한 희생에서 비롯됨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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